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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김천 직지사 여행기

by k198 2025. 6. 4.

김천 직지사
김천 직지사

 

김천의 천년고찰 직지사는 고요한 산중에 위치한 깊은 울림의 사찰입니다. 혼자 걸어도 좋은 이곳은,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여행지입니다. 자연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은 당신에게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을 소개합니다.

1. 천년의 향기가 스며 있는 그곳

경북 김천의 깊은 산중,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치 다른 시간 속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스라이 펼쳐진 산길을 따라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먼저 길을 내어줍니다. 그 바람결은 도심에서의 바쁜 숨을 고르게 해 주고, 어느새 마음속 소음은 점점 작아집니다.

신라 흥덕왕 3년, 418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이름만 들어도 그 오랜 시간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수많은 인연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성찰의 공간입니다. 특히 가람배치가 잘 보존되어 있어, 고즈넉하게 걸으며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산문(山門)을 지나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직지사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경내를 감싸는 자연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절집의 돌계단 하나, 지붕의 곡선 하나에도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고,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집니다. 계절은 초여름. 숲은 연둣빛으로 무르익어가고, 그 그늘 속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사찰의 기와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바라본 대웅전은 자못 장엄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위기는 오히려 따뜻하고 평화롭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평일 낮이라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나무 사이사이 새들의 지저귐은, 이곳이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착각을 더욱 짙게 만듭니다.

대웅전 앞뜰에는 천년을 바라보았을 법한 나무들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 나무를 올려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여기 있는 시간은 다른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나 보다.’ 당장 해야 할 일, 휴대폰 속 끝없는 알림들, 그렇게 우리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에선 자연스레 의미를 잃어갑니다.

이곳은 건축물 하나하나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습니다. 극락전, 산령각, 범종루 등 사찰의 구성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사진을 찍기보다 천천히 음미하며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대웅전의 단청은 가까이에서 보면 색이 바랬지만, 오히려 그 색바람이 전해주는 고요함이 묘하게도 마음을 움직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천년 고찰’이라 부르지만, 저는 이곳을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하는 장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조용히 사람들을 맞아주고, 나지막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괜찮아, 천천히 가도 돼.”

2.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산사의 산책

직지사를 찾은 그날, 저는 일부러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고 혼자 걸었습니다.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풍경도 좋지만, 때로는 온전히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이곳은 그런 바람에 아주 잘 어울리는 장소였습니다.

산문을 지나 걷기 시작한 초입부터 마음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끈을 하나하나 푸는 듯한 기분이랄까요. 조용히 걷는 동안에는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발밑의 자갈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렸습니다. 세상의 소음이 줄어들자,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서서히 커졌습니다.

혼자 걸으면서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아무 말 없이 나무 아래 서 있다가, 경내의 한 모퉁이 돌계단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던 걱정들이 조용히 잠잠해졌습니다.

이사찰은 그런 힘을 가진 곳입니다. 뭔가를 하지 않아도, 특별한 이유 없이 찾아와도 괜찮은 곳.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도 위로를 건네는 장소. 저는 이 절집이 가진 침묵의 위로가 참 좋았습니다. 오히려 큰 소리의 격려보다, 아무 말 없이 어깨를 토닥이는 느낌이랄까요.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하나 있습니다. 산사 한편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어요. 초여름의 햇살은 따뜻했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무언가를 바꾸거나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안. 그것이 여기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경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도는 길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머무는 곳마다 머릿속은 더 풍성해집니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거죠. 사찰이 주는 고요함이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주는 역할을 해주는 듯했습니다.

평소엔 지나쳤을 사물들도 이곳에선 다르게 다가옵니다. 마당 한편에 놓인 돌, 물끄러미 서 있는 석등,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하나에도 마음이 동하고, 그것들이 전하는 묵묵한 말들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사찰 여행의 매력 아닐까요?

직지사에서의 그날, 저는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고, 조용했지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죠. 그런 멈춤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었습니다.

3. 시간을 걷는 산사, 천천히 마주하는 나

직지사에서의 여정은 단순한 사찰 탐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시간을 걷는 듯한 기분. 수백 년을 견뎌낸 전각들과 돌계단, 손에 잡히는 듯 고요한 바람, 그 모두가 ‘지금의 나’를 조용히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시간을 느리게, 하지만 깊게 흐르게 해 주었습니다.

경내 한편에는 여전히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작은 종소리가 공기 사이를 타고 스며듭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도하는 장소, 어떤 이에게는 자연 속의 쉼터이지만, 저에게 익곳은 ‘멈춤의 미학’을 가르쳐준 곳이었습니다. 조금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죠.

많은 사람들이 빠른 것을 추구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이 시대에, 직지사는 반대로 ‘느림’과 ‘비움’이라는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휴대폰을 꺼두고, SNS를 멀리한 채, 그냥 흙길을 걷고, 나뭇잎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곳을 다녀온 후로 저는 일상에서도 ‘한 번쯤 멈추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어요. 바쁘고 피곤한 날, 산사의 그 고요한 돌계단이나 벤치가 자꾸 떠올랐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곤 했습니다. 여행의 기억이 이토록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건, 그만큼 내 안에 무언가를 흔들었다는 증거겠죠.

4. 독자 여러분께 전하는 이야기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혹시 지금 마음속에 작은 쉼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정신없이 바쁜 하루 속에서 ‘나’를 잠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저는 이곳을 조용히 권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걸으러, 쉬러,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찾아도 되는 곳이 직지사니 까요.

누구와 함께여도 좋지만, 혼자라면 더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없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고,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실 겁니다. 가끔은 그런 시간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니까요.

화려하거나 요란한 장소는 아닙니다. 하지만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묻는 시간. 그것을 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계절이 지나기 전에, 마음의 여백이 필요하다면 조용히 이 길을 걸어보시기를 바랍니다.